손님사절 2009. 2. 25. 01:43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전을 느끼는 것이 영화를 감상하는 큰 도움이 되니만큼 반전을 즐기시려면 창을 닫으심을 추천합니다.

위대한 사랑이여 너 잘 났다. 그 폐허에서 이제 당신의 아름다움 온 천하에 알리시라. "벌린 일을 어쩌라고?" 라고 하는 매몰비용따위는 고려 안하시는 인품 기개가 넘치매, 그대 그 똥배짱이 나를 사로잡았나이다. 돈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이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때 그때 살림을 어디서 충당하시는지 현실성 없는 그 어처구니 없음에는 영화적 상상력이라며 한표던지겠지리다. 주인공 둘의 싱크로나이즈 현대도심사고행각들 아주 그냥 죽여줘요.

사실 이 영화는 싸우고 터지는 진정한 남자의 로망을 느끼는 울끈불끈 무비로 생각했는데다. 그렇게 찬사가 이어지는 에드워드 노튼의 영화라길래 봤다. 사실 에드워드 노튼이라는 배우는 "끝장난다"라며 그의 작품에 대해서 환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루져니스트> 때 부터 명성을 한번 스쳐 듣고, 나중에 <프라이멀 피어>에서 연기력을 확인했는데 사실 그걸 가지고 내가 평을 할 눈을 지니지 못해서 잘 모르고 넘어갔다. 사실 나는 희번뜩 한 눈을 뜨는 장면같은 것에 공포심을 못느끼는 편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나마 무서워하는 한니발 렉터 박사 나오시는 <레드 드래곤>에서도 만났으니 아마 특정 배우의 영화중 누구 껄 많이 봤는지 따지면 톰 크루즈 영화도다 더 많이 봤을지도 모른다. 여튼 이 <파이트 클럽>도 그 말라깽이 아저씨에게 안어울려보이는 액션이 그의 색채가 여기저기서 물씬물씬 묻어났고 그 때문인지 노튼식 반전영화에서 최고 좋은 평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파이트 클럽의 장르를 따지면 도데체 무슨 장르를 붙여야 할까. 내용을 아는 사람은 느끼겠지만 다이하드로 시작해서, 흔한 싸이코 무비에서 이보다 좋을 순 없다로 이어지다가 록키로 이어지고 대부로 이어지더니 싸이코나 아이덴티티같은 다중인격 반전영화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터미네이터 3처럼 멸망할 듯 하더니 진정한 사랑을 찾는 오버더 레인보우(한국영화)로 끝난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간단하게 내용을

스포일러 포함해서

다 질러버리자면 한 지름신을 이기지 못하는 회사원이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그 위안으로 각종 만성불치병 또는 장애를 겪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우는게 그르케 도움이 됐단다. 그래서 좀 나아지나 했더니 지같은 사이비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여자랑 모임 분배를 했다. 그리고 한동안 출장 댕긴다고 비행기를 타고 다녔는데 그 사이 비누판매상을 하나 만났고 명함교환을 했다. 집에오니까 가스 폭발로 질러놨던 물건들이며 집이며 홀라당 날라갔고 그 여자는 전화안다고 비누판매상에게 전화를 해서 맥주나 한잔했고 그 분집에서 묵기로 했다. 근데! 둘이 집에 가기전 술집 뒤뜰에서 그냥 순수히 재미로 싸웠는데 그게 하나의 모임(클럽)이 되서 점점 규모가 커졌다. 그곳에는 뭐 나름 철학도 있고 규칙도 있고 뭐 그런 곳이다.

자, 여기까지 보면 난 에드워드 노튼이 약골에서 점점 브래드 피트 같은 겁나 잘빠진 몸매의 섹시가이로 진정한 파이터가 되어가는 성장영화인줄 알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그렇게 찬사를 받았나 했다. 이런식으로도 성장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했다가 이게 끝이 아닌 걸 알고 도데체 이 영화는 어디까지 가려나 걱정도 됐다. 그 클럽이 슬슬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의 군대처럼 사조직이 되어가더니 급기야 사고치는 와중에 한명 죽었고 뭔가 잘못 되어감을 느꼈덴다. 하지만 이를 어쩐다. 그 꼬여진 스토리를 다중인격장애로 진중권형님이 그렇게 씹어대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강림시켰으니 이게 어디를 봐서 영국 엠파이어지 선정 세계 500대 영화 무려 10위의 영화냐고 혀를 끌끌 찰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었으니 현실과 시뮬레이션의 세계에서 자각하는 메트릭스의 네오가 사랑의 키스 한방으로 이뤄짐에 감독이 깡패여 하고 소리치는 분들은 이 영화로 한 번 피토해 보시라. 하나 더 스포일러 짓 해줄까? 메트릭스2 트리니티는 총맞고 그나마 메트릭스의 신이 된 네오가 구해주지만 우리 노튼 씨는 총맞고도 알아서 살아난다.

이제 그만 씹고 그 어의없음을 봐줄 수 있는 이유를 한번 끄집어 보려 한다. 반지의 제왕도 판타지영화임을 고려하면 백색의 간달프의 환생도 감동이 되지 않던가? 그 처럼 파이트 클럽도 그 어의없음을 장르처럼 이해해야 한다는 거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좀 상태가 멍해졌던 것 같다. 메트릭스 볼 때와는 사뭇다르다. 그 때는 내 존재가 그냥 의심가도 어디엔가 진짜 내가 있겠지 하는 기대심은 살아있었지만 파이트 클럽은 그 기대심마저 지웠다. 아마 마지막 장면이 없었더라면 새벽 내내 정신 못차렸을 것이다.

왜? 우리는 누구나 환상을 품고 그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니 말이다. 철없던 대학생 시절에 꿈이 무어냐고 물으면 우리나라의 광고 대부가 되어서 돈 왕창 벌고 강남의 어느 깡총한 인테리어가 된 사무실에서 이쁜 여비서 앉혀 놓고 가끔 프리렌서 짓 하다가 에세이나 쓰고 책팔아 돈버는게 내 꿈이었다. 그게 아니면 글빨이 전국적으로 먹혀서 진중권 유시민 같은 진보 논객이 되는 것이기도 했고, 조국, 장하준 같은 프로페셔널기가 좔좔 넘치는 교수가 되어서 강의도 하고 학자로 늙어가는 꿈도 꿨다. 그런 허망함 부터 마포의 서른평 아파트에 SM3를 끌고다니며 남자 줄줄이 꿰어찰 법한 귀여운 딸을 가지는것도 소원이었다.

파이트 클럽은 그마저도 다 환상이라고 몰아 붙였다. 우리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환상의 고리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하고 성공이라는 환상을 하게 만으로 자본주의 노예로 스스로 전락하게되었다. 영화는 한 수 앞을 더 내다 본다. 자본주의의 약간의 성공으로 도심의 자유를 느끼는 그런 인간들을 최악의 도시 노예로 만들었다. 바로 주인공의 지름신으로 말이다. 적당히 돈벌고 적당히 시간나는 그런 커리어들을 지름신의 노예에 친구라고는 기르는 개 한마리 없는 외톨이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서 끝나면 파이트 클럽은 섭섭하다. "돈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목표는 아니다. 단지 수단이다." 요기서 끝나면 이 영화는 노튼과 브래드 피트의 실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돈은 수단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멍청히 서있는 니가 더 병맛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보고 나서 곱씹다 보면 "그렇다고 해서 없는 도시의 자유를 찾으려고 하는 귀얇은 넌 답이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놀랍지 않은가? 조조가 제갈량에게 몇번을 낚시질 당하는 느낌이다. 그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말이다. 

현대사회의 평범한 일상생활의 병폐인 무관심과 단절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는 몇 수 더 내다 본다. 만약 무관심과 단절을 비판하려고 영화가 만들어 졌다면 그 해답은 이미 핑크 플로이드가 영화나오기 20여년 전에 해뒀다. 영화는 그 대안으로 떠들어대는 '소통'에서도 해답을 구해보자고 질문을 던진다. 그 소통을 위해 만들어지는 클럽과 단절된 개인을 중심으로 영화의 틀이 생겨났다면 늘 20년 전의 답을 부르짓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소통이니 부르짓는 앵무새 사회학자들까지 캐관광시켜버린 꼴이 되는 셈이다. 이런 모든 것의 부정을 가진 아나키즘적 영화(추측컨데 아나키즘도 부정한다. 그 파이트 클럽이 파시스트 화 되지만 그들 모두다 아나키스트 아니던가?)는 도데체 가늠할 수 없는 대책없는 정답없는 영화가 되버렸다. 장르? 그딴거 없다. 전부다면 전부다고 전부 아니면 아닌거다.

영화의 결론은 간단하다. 그저 옆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행복을 찾으라는 것 정도? 그 때문에 이쯤에서 영화의 장르는 멜로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고보니 이런 감독의 대책없는 영화를 사람 보는 내내 기대하게 한 것은 배우들의 호흡과 망가짐 덕택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노튼에 열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닐라 스카이의 아름다운 회귀라기 보다는 붕괴라는 시큼 털털한 세계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찝찝하지만 어쨌든 결론은 내야 하는 것이니까 그저 영화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면 그리 욕만할 대책없는 영화가 아니라 몇번을 되돌아봐야 하는 그런 심오한 영화가 되버린다. 그리고 이런 심오한 영화에 블록버스터 S급주연 배우들이 소화를 잘 하시니 이제는 이 영화가 세계 1%가 될 수 있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