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보이

소외된 개인과 영웅의 차이 (2) : 축제

손님사절 2011. 10. 5. 08:11
흥청망청 마시고난 다음날 머리가 깨질듯한 숙취가 몰려옵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것 같기는 한데 자세하게 다 기억은 나지가 않네요. 조금 더 앞서가볼까요? 일단 깨고는 봤는데 낯선장소입니다. 누구에게는 호텔방이 될 수도 있고 대학시절에는 이름도 기억안나는 선배의 자취방이 될 수도 있겠네요. 

제 경험을 이야기해보자면 일단 선배의 집에서 깨어났습니다. 평소같았으면 다음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행히도 그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S동에서 새벽까지 마신 후에 차가 끊겨서 전화하고 묵게 해달라고 했다더군요. 더 웃기는 일은 들어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왔다고 봉투를 흔들어 보여줬는데 봉투에는 아이스크림은 커녕 사발면 두개가 덩그러니 있었다고 합니다. 즉, 필름이 끊겼었죠.



몸을 추리고 주섬주섬 밖으로 나오는데 여기저기서 이름 모를 사람들의 명함이 나옵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자세히 누가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새로 알게된 친구들이 좀 있기는 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했나 싶습니다. 명함은 양반이죠, 전화번호부에는 저장안한 번호가 반, 저장한 번호가 반인데 그 중 반은 또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전화가 오는데 굉장히 친한 척을 하면서 어제의 안부를 묻습니다. 선배집에 잘 들어갔냐며, 걱정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 상황을 가지고 전문적으로 '죽었다'고 그러죠?  체네 알콜이 필요치 이상으로 쌓이면 일어나는 증상입니다. 누구나 성인이 되면 한두번쯤은 어련히 겪는 일이라고 합니다. 저 같이 술버릇이 고약하지 않은사람이야 아이스크림을 사발면으로 착각하고 그렇지만 흔히 술먹으면 '개'로 변신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죠? 평소때는 그렇지 않은데 술먹으면 그렇게 변신을 합니다.

주말이 다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느때처럼 아침에 부지런을 떨면서 일터로 갔죠. 그리고 여느때처럼 별로 안면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아침 인사를 하고 일상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날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겼던 '친구'들이 생각이 나네요. 그렇게 마음을 터놓고 그 시간만큼은 정말 함께 즐겼는데 막상 일상에서 그렇게 다시 하라면, 아마 못할거예요. 




그 당시를 잠시 돌아보죠. 처음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저 즐기기위한 '파티'인데 일단 누가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단하나의 사실은 '즐기러 왔다'는 목적과 '누군가를 알고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석자들은 최대한의 매력을 발산하거나, 그저 놀러온 사람이라면 최대한으로 긴장을 늦추게됩니다. 즉, 일상의 나로부터 변신을 하기 시작하는거죠. 매개체는 술이될 수도 있고 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상의 나는 없어지고 축제의 참석자로만 내가 남게 됩니다.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죠. 


변신이 끝난 나는 '발산'을 하게됩니다. 욕구들이 하나둘씩 표출되는거죠.  일상의 공간에서는 대부분이 똑같은 생활패턴을 반복하면서 욕구를 쌓아두는 편입니다. 반면, 일상은 수렴하는 시간들입니다. 일을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조직에 순응하거나 때로는 자연에까지 헌신하는 모습으로 시간에 봉사를 하죠. 그러니까 쉽게이야기해서 스트레스쌓이는 순간입니다. 마음 속에서는 무언가가 자꾸 꿈틀대기는하죠. 그렇게 억눌렸던 그 무언가는 발산하기 위해서 변신을 하는 겁니다. 표출이 되는 것이죠.

이 순간은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보면 신성하다고도 해야할까요? 모든 것에 굴하지않고 그 위에 있으니 말이에요. 우리 흔히 술먹다가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죠? 아마 그들은 평소에 일상에서 싸우라고하면 싸우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축제의 상황에서는 싸움이 쉽게 납니다. 쉽게 따지면 야구장에서 선수보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것을 예상해도 되겠네요. 가끔 뭐도 던지잖아요. 즉, 지금의 나는 '신'으로 부활한 상태입니다.


<신성하다 못해 의식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이런 비일상적인 상황이 압축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 단계를 가지고 리미날리티(Liminality)라고 했고, 이때의 공간 그리고 참석자를 코뮤니타스(Communitas) 라고 명명했습니다. 리미날리티 단계에서는 순간적으로 일상과의 흐름이 단절되고 일상의 나는 죽게됩니다. 대신 일상에서 자리잡고있던 신이 '부활'하죠.


<일상이 지속되다가 비일상적인 시간이 한정된 시공간에서 압축적으로 나타납니다.>


이제부터 나는 신이기 때문에 어떠한 의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군림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 공간에서 지내는 거죠. 그럴 법도 한게 나 이외의 공존하는 사람들도 '신'으로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왜 꼭 그런 후배들 세워놓고 뭐라고 하는 상사(선배)들 있죠?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술자리(축제)의 흥(리미날리티)이 깨지는거예요.터놓고 이야기를 해도 시원찮을 망정에 말이죠. 아무튼 그 순간에는 의무도 없지만 권위도 사라지게 됩니다. 진정한 평등한 상황을 만나는 것이죠.




며칠 더 일상을 보내다 당시 멤버였던 그가 또 저를 찾게 되네요. 슬슬 현장에서 있었던 사람들도 종종 그 이야기를 하곤합니다.  저를 대하는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도데체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잠깐 죽어있던 사이에 무슨일이 일어났길래 그랬을까요? 아니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건 간에 일상의 무언가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이전과 같게 대한 이상한 노릇일테죠. 만약에 이전과 같아졌다고하면 그 날 당신은 그자리에 없었거나 그제 준할 정도로 숨어있었다고 보면됩니다. 즉, 내면의 신이 부활하지 못한거예요. 

<리미날리티를 거친 후에 일상은 이전과 달리 약간씩 방향이 틀어집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리미날리티를 한번씩 거칠때마다 일상의 모습은 조금씩 바뀌어져갑니다. 그러니까 회식도 하고 그러는거예요. 이전에는 별로 친하지 않았던 사람이 회식하고 술자리에서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니까 다음날부터 말 붙이기가 쉬워집니다. 어떤 '계기가 바로 그 리미날리티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당시 일어났던 행위들은 '의식'에 해당됩니다. 다같이 건배를 한다거나 응원가를 다함께 부르고 파도를 타기도 하고, 행위 하나하나가 부터 리미날리티 전체의 과정 모두가 의식이 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더 쉬운 이해와 참고를 위하여 한가지 비교를 해보도록 하죠.

이 리미날리티는 축제가 기본이 되어서 설명이 되어서 그런데 제 생각에는 회사의 프로젝트에도 비교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기획서를 쓴다고 해보죠. 일을 배정받은 나는 도서관을 가거나 웹사이트를 뒤지면서 무언가를 막 무언가를 찾아봅니다. 재료가 있어야 무언가를 만들테니까요. 



그러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그 분이 살짝 노크합니다. 그때를 놓치지않고 나는 생각을하기 시작하죠. 이전의 수동적인 '수렴하는 나'는 사라지고 무언가를 쏟아내는 '발산하는 나'로 부활합니다. 그런데 아이디어를 아무리 천재라도 며칠내내 쏟아내는 사람은 없겠죠? 또 나온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스스로를 수렴하다가 또 무언가가 나오면 발산하다가 이를 반복하게됩니다.

개인일 경우에는 이렇죠. 그런데 집단일 경우에는 어떨까요? 예를들어 팀이 기획서를 쓴다고 해봅시다. 각자 나누어서 일을 배분하고 일이 시작이되었습니다. 각자 흩어진 상태에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찾아다닐 것입니다. 수렴하는 상태인거죠.

여기서 회의하는 시간이 발산하는 시간으로 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습니다. 발산한다면 순간 회의는 축제가 되고 그 참여자들은 모두 '발산하는 나(신)'로 부활하는 것 입니다. 이때부터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시끌벅적한 좋은 회의가 되는거죠. 아니라면 아직 모두가 모이기는 했어도 수렴하는 나인 상태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축제는 커녕 그저 일상의 나들이 모여이을 뿐이지요.

회의시간에 사람들이 활발하게 떠들기 시작했다고 해봅시다. 이때는 오고가는 과정 속에서 구성원들이 무언가를발산합니다.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거죠. 그러니까 변신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상사나 선배의 눈치를 보고 의견개진을 못하면 그 사람은 부활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회의를 성공적으로 해본 경험이 있으면 누구나 알겠지만 눈치안보고 마구 쏟아내어야 회의가 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서서 회의의 결론을 또 내게되겠죠. 아마 회의실을 나올때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다들 신나해 할 것입니다. 즐겁게 축제를 즐긴셈이지요.


회의가 끝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일을 시작합니다. 같은 프로젝트이기는 한데 아까와는 다르게 일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의 시간(프로젝트)는 리미날리티(회의)로 인해서 약간 방향을 바꾸게 된 셈이죠.

그런데 회의는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아무말도 안하고 멍하니 먼산만 바라보고있습니다. 사람들은 모였을지언정 변신하지 않았으니 여전히 수렴하는 상태입니다. 팀원들에게 좀 더 수렴할 시간을 더 줘야합니다. 더 진행해봐야 의미가 없어요. 간혹 이런 상황에 팀장(리더)가 아무것도 안해왔다고 심하게 나무라는 경우가 생깁니다. 관리자로서 여태 혼안내고 수렴하는 나가 드디어 쌓인 무언가를 억제하지 못하고 발산하는 나로 변신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상태가 혼자서만 일어나게 되는거죠. 팀원중 누군가가 개기지 않는 이상 축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축제하는거죠. 즉, 미친겁니다.






그런데 한가지 설명 안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리미날리티가 끝나는 부분입니다. 신으로 부활한 발산하는 나는 나타나기는 했는데 어느 순간 부터 지금부터 끝~ 이라고 외치면 그냥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걸까요? 아까 리미날리티가 시작하는 과정에서는 일상의 나는 죽고 신으로 부활한다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리미날리티가 끝날때는 신이 죽고 내가 부활하는 것이어야 하나요? 그렇게 된다고 가정한다면, 신으로 부활하는 상황은 그럴듯해도, 신도 아닌 사람이 부활하는 것은 무언가 어색하네요.그렇다면 신은 어디로가고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일단, 리미날리티가 끝이 나면 신은 승천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용어를 빌리면 열반이라고도 할 수 있고 플라톤의 말을 빌리면 이데아로 건너간 셈입니다. 리미날리티에서 그랬듯 그 당시 즐기는 나는 그리고 그 상황은 굉장히 이상적입니다. 뒤돌아보면 그리워질 정도가 되는 것이죠. 그 순간에 있던 그 신은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기억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승천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겠죠. 그리고 나는 일상으로 새로운 나로 거듭나야합니다. 그 영원한 기억을 안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죠. 즉, 나는 일상에서 그 영원한 기억을 안고 부활이 아니라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영화 Matrix에서 Neo는 재탄생을 두번이나 합니다.>

아까 회의의 비유를 적용해보자면, 회의가 잘 끝나고나서, 또는 그분이 오셔서 무언가가 진척이 되죠. 아이디어가 새롭게 태어난 겁니다. 이 아이디어가 프로젝트에 하나씩 올려놓아진다고 생각하면 프로젝트는 새로운'시대'를 맞이한 셈이죠.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전까지 했던 것을 다 엎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아 이게 아니었구나..하고 그래도 아이디어 덕분에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신나게 뚝딱거립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기획서나 시안이나 설계도, 작품들을 보면 이전과는 뭔가 비슷하긴해도 분명히 '차원이 다르다'할 정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아도 리미날리티의 끝은 일상의 것이 '재탄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죠.

정리하면, 리미날리티는 삶의 방향을 결정해주는 압축적인 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우리는 늘 일상이라는 조류에 휩쓸려가다가 중간중간 그 흐름을 돌이킬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누군가를 만났다거나, 어떤 영감이 떠올랐거나, 어떤 말을 듣거나, 책이나 연극 영화 그림 등등의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되죠. 이것들이 바로 삶의 '결정적 순간' 또는 '터닝포인트'가 됩니다.



만약 한사람의 인생이 이야기로 나오게된다면, 그는 어제도 밥을 먹었고 오늘도 밥을 먹었다... 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어느날 배가고파서 급하게 밥을 먹다가 체했는데, 그 고통이 너무 심해 소화기내과의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런 이야기는 쓰여지겠죠. 그러니까, 리미날리티는 축제뿐만이 아니라 삶의 여러 순간순간들을 언급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즉, 리미날리티를 통해서 한 인간의 서사가 만들어 지는 것이죠. 영웅이 되어가는 것 입니다.

(Co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