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대학생 무식한 대학생
여기 가난한 한 명의 사람이 있다고 하자. 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것일까, 사회가 그를 가난하게 만들어서 가난한 것일까? 굉장히 간단한 이분법인데 인류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나오기 전까지 이런 방식으로는 나누는데 굉장한 노력을 들여야하거나 못나눴다.
가난은 현재 우리가 직관적으로 보기에는 경제학의 영역이겠지만 가장 먼저 철학과 윤리학의 문제였다.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먼저 나온 이야기라고 하니 가난이라는 문제가 경제학에 이어 행정학까지 우리가 실제로 사는 세상에 학문이 접하기 까지 얼마나 돌고 돌았다는 소리인가.역사상으로 가난과 싸우려고 했던 군주는 로또만큼 만나기 힘들다. 조선왕조 500년에 세종, 정조 두 분이라 치면 500년에 1:13.5의 확률이다. 그리고 이 군주가 개혁적인 신하를 두어야한다. 그래서 보통 가난에 대해서는 실천보다는 계획이 먼저 나오고, 계획보다는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학문이 먼저 다룬다.
이번에는 무식한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하자. 그가 무식한 것은 그냥 머리가 단순히 나빠서일까? 아니면, 불우한 환경에서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그럴까? 참, 여기서 “문맹”과는 구분하자. 문맹은 정말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다. 지금 우리는 개개인의 유/무식에 대한 사회적 경향 따져보자는(그 말이 그말인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이분법이 개소리가 되는 감정이 올라 올 것이다.
한 사람이 무식하다의 기준부터가 일단 모호하단 것은 미뤄두고서라도, 그냥 단순히 글을 잘 못 읽는 사람일 수도 있고, 재수없게 자신의 능력을 펴볼만한 환경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종종 그러는데 가장 무식한 놈은 독하게 공부만해서 서울대에서 박사따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 역설처럼 무식이라는 것은 정말로 상황에 따라 변하는 추상적인 허상이다. 무식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계산을 타고나면서 잘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에는 가난한 대학생이 있다. 아니 대학생들이 있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 재수없게 IMF를 호되게 겪은 부모아래에 태어나서 학창시절에 가세가 휘청했거나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천당아래 분당이 고향땅이라 재개발 특수를 누렸거나 어디 묵혀두었던 주식이나 땅이 잭팟을 맞아서 그 깊지도 않지만 빠져나오기도 힘든 먹고사니즘의 늪에서 벗어난 친구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국난이라고 불린 시기에 긍정보다는 부정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그래서 누구에게 밥얻어 먹은 것이 보릿고개도 없는 이 시대에 자랑이 되어버렸고, 맛집을 다녀오는 일은 블로그나 싸이월드 페이스북에 감정을 표출하는 각자쓰는 에세이의 주 소재가 되었다. 거기에다 문화생활, 예를들면 콘서트라던가 뮤지컬이 하나 더 붙어버리면 그날은 스타가 되는 날이다. 결국 청년 빈곤화는 그렇게 전세대가 어디다 털어먹었는지 아니면 남들이 다 싹쓸어갔는지 모르는 그 텅빈 시대에 20대가 던져지다보니 찾아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무식한 대학생도 있다. 일제시대부터 억지로 나눠놓은 이과랑 문과의 구분이 이과적 머리와 문과적 머리라는 이상한 인간분류법이 등장했다. 여기에 예체능이라는 제3분류는 난개발국가 취급을 받는 수준이니 논외로 하자.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런 이상한 제도 아래에서 변화도 없이 쭉 밀려왔다.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변화의 시도가 없던 것도 아니었지만, 입시라는 틀은 절대로 깨부시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19세기의 교육학으로 20세기의 선생님이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쳤고 아이들은 이상한 민족주의 감성에 절대적인 문화 상대주의를 품은 채로 차별이 난무하는 다문화 사회에 던져졌다. 그리고 저마다 입시라는 문턱은 저마다의 상황에 맞춰 꾸역꾸역 헤치고 나와서 사회라고도 하고 대학이라고 하는 연옥같은 들판에 또 던져졌다.
이 나라는 대조직 중심사회다. 정부의 큰 조직과 대기업과 공기업들만 남아있다. 현대의 아파트에서 삼성의 기계를 끼고 리바트의 가구에 살아야하고 풀무원 농심 SPC가 만든 음식을 먹고 대림에서 만든 변기에 똥을 싸야한다. 이 과정에 수자원공사의 물을 쓰고 한전의 전기를 쓰며 추울때는 지역난방공사의 열로 몸을 덥혀야한다. 철저하게 제도와 조직이 지배하는 사회라 작고 자치적인 것은 없고 그 조직 안에 들어가야 살아남는다. 가난한 대학생과 무식한 대학생의 미래(라고 쓰고 생존이라 읽어야하)는 과업은 ‘월급’에서 만난다.
국난을 치룬 가난한 사회에서는 월급을 위해서 공부해야했고 월급을 위해서 입시를 치뤄야했기 때문에 어느정도 무식해도 상관없었다. 교과서에 올라오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앨빈 토플러의 ‘제3물결’은 알겠는데 촘스키, 에코, 하버마스는 일단 모르는 것이 정답이다. 알게되는 것이 시간낭비였다. 대학을 가서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유효하다. 그나마 그들정도 이름이라도 들어봤으면 다행이지 칼 폴라니같이 최근까지 주목받지 못한 사람을 알면 이상한 놈이 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조지 소로스, 피터 드러커, 톰 피터스는 알면 괜찮다. 스티브 잡스는 말년에 이 줄의 맨 앞에 섰다. 무식한 대학생은 이렇게 태어났다.
그런데 어쩌랴 억압받고 자란지도 모르는 이 세대들은 시간의 감옥의 갇혀오면서 섹스는 못하고 섹시만 쳐다보고 자라버렸다. 급기야 여대의 축제에서는 치마길이를 스스로 줄이면서 남학생들을 모으고 사내아이들은 몸키우기에 바쁘다. 여전히 스무살이 넘은 이들에게는 섹스는 대놓고 좋다고 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섹스의 결론은 사랑이었으면 좋겠는데, 저마다의 감정과 상황이 너무 많이 개입하므로 제외하고, 생리적 결론은 출산이고 사회적 결론은 육아다. 섹시만 쳐다보고 자라버린 세대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해줄 수 있을까? 절망적이다. 이런 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이 쿨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가난한 청년이라서 섹스는 누군가에게 감정적, 현실적으로 기댈 수 있는 도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결론이 무어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당신이 지금 가난하고 무식하다(또는 했었다)고 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가난한 대학생이고 공부를 모르는 무식한 대학생이(었던 직장초년생이거나, 백수면 비극이겠)다. 우리 지금의 잠깐의 과거를 잠깐 훑어봤다. 결론? 아마 이것이 사회학과 역사학과 경제학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분석에서 ‘가설설정’ 과 ‘상황분석’ 정도가 될 것이다. 당신이 대학시절 줄기차게 배워야 아니 외워야 했었던 그것. 혹시 ‘고객 분석’을 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