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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보이

소외된 개인과 영웅의 사이 (3) : 모험

by 손님사절 2011. 10. 21.

어느날 내 가슴에 따뜻한 느낌이 나면서 주변에 광채를 뿌리는 물건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유려한 자채가 심상치가 않네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자꾸 생각이 나고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들어보면 평이 장난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분이 오신거예요. 


양 옆에 천사랑 악마랑 '퐁'하고 나타나서 해라 마라 하면서 고민하게 만들잖아요. 이 천사와 악마 녀석들이 진짜 삶에 있어서 괴물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현실의 삶을 방해하고있는 진짜 괴물이라는 것이죠. 실제의 나는 무언가를 하고싶어서 무슨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데 현실의 제약이 나를 방해합니다. 혹은 양심이 나를 방해하기도 하죠. 그런데 무엇이 현실의 제약인지 무엇이 양심인지 애.매.한 것도 있습니다. 괴물이 천사의 탈을 쓰고 나올 때도 있고 정면공격을 할 때도 있는 것이죠. 

현실의 이런 문제는 부지기수로 쏟아지죠 그것도 원치 않게 쏟아집니다. 특히 지금의 현실에서는 정보와 재화가 넘치는 시대라 그런지 문제도 넘쳐납니다. 이렇게 무언가를 사고 안사고의 문제라면 그냥 간단하게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로 바꿔도 됩니다. 여유있으면 사고 아니면 참으면되죠. 



그런데 이 문제를 조금 비틀어서 돈도 없는 주제에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로 바뀌가 않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조금 더 비틀어서 지금의 안정을 포기하고 서라도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해보죠. 그러니까 내가 지금 ‘시인’이 되고 싶은데 시를 쓰자니 아무래도 직장을 관둬야할 것 같고 글쓰기 교실에도 나가자니 키우던 애는 어떻게하고 그래야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냥 그런데로 살아가자니 삶이 공허해지고 나서서 헤치면서 살아가자니 힘들 것만 같고 쉬고 싶고, 지금 이방향이 맞는 것인지 맞다면 어떨게 될 것인지 아니면 과연 무엇이 맞는 것인지. 사소한 것들이 불러일으킨 사소한 문제들인데 고민을 이어가면 이렇게 자기 자신 인생 전체로 수렴합니다. 모험을 하냐 마냐의 고민으로 모아진다는 것이죠.



그런데 신화에서 영웅들을 보면 모험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은 안합니다.
모험을 어떻게 해서 난관을 해쳐나갈지를 고민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만한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오디세이 같은 경우에는 집에 가야하니 모험을 하고 말고 선택할 거리가 없는 것이죠. 즉, 영웅에게 모험이란 것은 운명입니다. 그냥 어찌 할 도리가 없어요.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기는 괴로운데 '아이러니'하게도 헤쳐가야 할 뿐이죠.




우리에게 삶은 그렇게 주어졌습니다. 누구한테 물어보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누구나 어느위치에 있건 각자의 고민은 다 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도 고민이 있어서 수행을 떠나잖아요. 그리고 그 고민들은 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각자의 삶에 운명처럼 각자의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비극적인 현실이 주어지기도하여서 종종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만 그런 현실을 또 부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정리하면, 삶이 던져준 모험을 헤치면서 사느냐 아니면 애써 무시하고 사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늘 직면합니다. 그리고 그 기로에는 '자기 자신'이라는 괴물이 있죠. 영웅은 모험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모험 중에 있는 괴물을 물리쳐야되는데 나 자신과 싸워나가는 것이 곧 영웅이 되는 길입니다. 아니 나 자신과 싸우기보다는 진짜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네요.





인생에서 이러한 시기가 처음 찾아오는 때가 있는데 대게 사춘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춘기가 몸의 변화도 있기는 하지만 마음의 변화도 생기죠. 사람마다 의견은 다른데 저는 몸에 자신의 정체성이 자리잡히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적인 행동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죠. 스스로 판단을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무언가를 습득합니다. 그러니까 홀로서기가 가능하단 이야기죠. 모험을 할 준비, 영웅이 될 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동안 가지고 있던 생각들도 버리고 버릇도 버리고 어리광부리는 나는 점차 추억으로 버려두게 되죠. 괄목상대라는 말처럼 하루가 지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있게 됩니다. 즉 이전의 나는 죽는 것이죠. 그리고 깨닫는 순간에는 누구의 제약도 받지않고 마음을 펼쳐나갑니다. 그러니까 각성 후 먼치킨이 되는 셈이죠. 이러한 영적체험의 경험을 안고 나로서 다시 태어납니다. 지난번의 축제편에서 이야기한 리미날리티를 지나오게되는 것이죠. 

* 이 리미날리티는 개인의 인생에 비추면 '사춘기'가 대표적으로 해당되고 사회에 비추면 '혁명'이나 '전쟁'이 해당됩니다. 『기억』편을 준비하면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사춘기와 관련된 축제에는 성인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인식은 사춘기가 끝나는 때에 행해지지 사춘기에 접어들었다고해서 해주지는 않아요. 사춘기가 시작이 되면 오히려 모험을 떠나라고 부추깁니다. 어떤 부족들은 여자아이들이 첫 생리를 하면 홀로 집밖으로 못나오게 하는 경우도 있고, 남자아이들은 사냥을 해와야한다는 등의 과제를 내어주죠. 하

그렇게 시작된 첫 모험을 마치면  축하를 해줍니다. 성인으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험을 끝내서 축하해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모험을 잘 하라고 해주는 것입니다. 진짜 모험을 떠날 모험을 마친 것을 축하해주는 것이죠. 우리가 토론을 할 때에는 '문제제기'부터 하잖아요? 그것과 같은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스스로의 인생에 문제제기를 사춘기 내내 했고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을 해내면 '성인'이라고 인정을 해주고 축하해주고 축제를 열죠.





요즘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문제제기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성인식을 성대하게 치를 필요도 없고 제대로 하지도 않죠. 그냥 하루 나이 더 먹은 꼴입니다. 모험을 떠난 적이 없으니 그러합니다. 즉,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볼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죠. 모험을 떠나지 않았으니 영웅도 없고 이야기(서사)도 없습니다. 그러니 축제를 하나마나죠.

그나마 비슷하게 있는 것이 졸업식이 있죠. 그런데 졸업식은 공부를 마쳐서 축하한다가 아니라 해방되었다고 축하해줍니다. 감방 출소한 것 마냥 좋아하죠. 학교의 존재 방식이 잘못된 결과입니다. 요즘의 (특히 우리나라)학교는 어느 순간엔가 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감방의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지금의 작은 영웅들은 학교에서 해야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도 모른채 나이만 처먹고 덩치만 커져서 나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은 어떻게 하는지, 무엇을 잘 할 수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가지고 있습니다. 약간 와전이 된 형태로 말이죠. 무엇이 좋아보이는지, 어떻게 해야 괜찮아 보이는지, 무엇을 잘 했으면 좋겠는지 말입니다. 이과나와서 공부잘하면 의사를 해야되고 문과를 나오면 로스쿨을 가야할 것 같습니다. 공대를 나오면 사업을 해서 대박을 쳐야 할 것 같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들은 감방같은 학교(그리고 학생들이 마주하는 사회)가 알려준 해답이지 내가 찾아낸 해답이 아닙니다. 

감방같은 사회가 알려준 해답은 전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에 대한 것은 없습니다. 우등생이 있다고 하면 사회는 의사가 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잘하면 연예인도 꼬실 수 있다고 합니다. 우등생이 아닌 다른 친구들은 그 친구의 현실을 부러워하죠. 우등생 본인의 생각은 어디에있을까요? 정작 보인은 그렇게 좋아보이는 것에 현혹되어버리고 그게 진짜 꿈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의사가 된다고 해봐요. 원치도 않는 피고름 짜고 맨날 고생하는 것을 후회하는 한탄만 터져나옵니다. 모험을 떠나라고 떠나라고 운명이 이야기하는데 뭔 개소리야 하면서 운명을 피했어요. 그러니 그냥 시간이 흘러갈 뿐입니다. 이야기가 만들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사회 혹은 현실 이라는 괴물에 영웅이 이미 나오기도 전에 죽었는데 무슨 이야기가 만들어지겠습니까?



인간이 제도화된 틀에 인간을 묶어 놓은 것은 그렇게 인류역사를 두고보면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인간이 '규격화'되면서 영웅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이렇게 예측가능하게 만들면서 모험도 없어지고 운명도 없어졌죠.

이러한 사회에서 나타난 영웅은 과거의 영웅과 다릅니다. 의식적인 영웅이 나타난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의식은 우리가 합리성 또는 이성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 의식은 인간의 전부가 아닙니다. 일부일 뿐이죠(조셉 캠벨, 신화의 힘) 인종 불평등과 같은 문제는 100년도 안되었는데 아직도 완전히 해결이 안되었죠. 사람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절대 고쳐지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의식으로 만들어 놓은 틀도 인간이 쫓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어요.

이런 이성을 지나치게 맹신해서 사회를 살아가는데 사람은 없고 ‘의식’ 만 남겨지다보니 지금과 같은 이상한 사회가 생겨납니다. 영웅의 사전적 의미가 남들보다 지혜롭고 용기가 있어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우리 사회의 영웅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보다는 의식을 믿고 사회를 합리화의 기준에만 맞추는 사람이 영웅이 되어버립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은 반영웅(Anti-Hero)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죠. 이를테면 스타워즈에서 다스베이다와 같은 인물이 우리사회에서는 영웅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부추기기까지 하죠. 인생을 결과물의 총합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영웅은 모험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영웅이 되어갑니다. 시행착오도 겪고 깨닳아가면서 진정한 영웅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영웅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어쩌다 한번 얻얻어걸려서 '대박'을 치는 경우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 또는 누구나 갈망하는 것을 이루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가지고 이들을 영웅이라고 하지는 않죠.





현대사의 영웅이라고 칭송받은 사람 중 '체 게바라'를 예로 들어보죠. 이 사람은 전쟁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게다가 공산주의자입니다. 인간의 재산권을 뒤도안보고 쌩깠어요. 누구의 입장(결과물)으로 본다면 그는 전범이고 독재자 카스트로가 집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죠. 하지만 그의 평전이 널리 읽히며 우리는 그를 영웅으로 부릅니다.





이러한 과정 중심의 시각에서본다면 몇몇 과오가 있다고 해도 영웅의 위치가 깎여나가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오디이푸스의 이야기처럼 잘못은 비극으로 그려지게되죠. 그의 잘못을 비극으로 승화시켜 모두가 공감하고 함께 나누게되죠. 

예를 들어보면, 얼마전에 타계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돈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기부도 안하고 폭스콘 노동자의 실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았고(노력도 안보였죠) 아이폰4가 나올때는 안테나 문제도 그냥 스리슬적 넘어가려고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들은 비판을 가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는데 사후 그의 업적이나 정신을 깎아 내리는데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몇몇 단점이 있었지만 그는 영웅이었다고 칭송을 받죠.

반대의 경우(반영웅 Anti-Hero)도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습니다. 경제발전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의 초대대통령으로 재평가 받아야한다는 움직임이 있죠. 하지만 그런 결과물이 있다고해서 그들의 생애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이미 이 두 대통령은 역사적인 심판을 받았는데 그 과정이 모두 비도덕적인 ‘독재자’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체 게바라, 스티브 잡스와는 반대의 사례가 될 수 있겠네요. 결국 한사람의 평가(영웅이냐 아니냐의 평가)는 결과물의 총합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생전의 과정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나이 안먹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춘기는 그렇게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운명처럼 세상에 나와서, 운명처럼 성장하고, 운명처럼 살아가다, 운명처럼 고민을하게 됩니다. 운명처럼 인생이라는 모험이 다가오죠.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 영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거죠. 추측에 영웅 신화는 그 영웅들을 두고두고 숭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 이야기로 조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 조언은 아무래도 삶이란 것은 어쩌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불가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앞으로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말고 지금 당장의 너 자신이나 걱정하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진정으로 시선을 두어야 할 곳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인간은 그리고 인생은 사회속에서 학습된 의식에 맞춰 살아가야할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소외된 개인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영웅이니까요.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할 차례입니다.

(co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