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위대하다. 특히나 할머니들은 더위대하다. 확장을 해서, 여성은 위대하다. 그 위대함을 맘속에 아로 새기고 있으면 지하철에서 가방던지는 아주머니들은 소수로 전락시킨다음 '어머니를 욕보인 소수'라고 차별하고 싶다. 즉, 어디에나 있는 특별한 미운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를 본다면 결론은 '위대하다'이다.
이런저런 연애담을 들어도 잔소리를 하고 챙기는 쪽은 늘 여자쪽이다. 남자는 사고치고 여자들은 기다리다가 화가난다. 군대를 기다리질 않나, 시험붙기를 기다리질 않나, 취직을 기다리기도 한다. 못나고 못해도 여자들은 참아준다. 물론 배신을 당하는 것도 여자이다. 자신을 바치는 것을 보면 존경해야 마땅하다.
여자들은 이기적이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면 당황한다. 그 당황을 대게의 남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감성으로 메우려고 한다. 연인관계에서는 실수가 용납이 되지 않고 실수가 누적된다. 참는 것이 아니다. 두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그 두고봄을 두려워 하는 여자들은 그 실수를 그 자리에서 지적한다. 어떤 방식이든 그 실수들은 여자들에게 '사랑이 식었다'로 보인다. 그리고 다투게 된다. 그걸 달래기위한 공인된 방법으로는 남자가 자신을 다 쏟아내고 여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여자인데, 그 여자가 다 같은 여자라고 주장하고 싶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운 소수와 존경해야할 위인급 소수도 제외하고...) 간단하게 내 어머니의 예를 들어봐도 그러하다. 아버지의 말다툼의 시작은 굉장히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된다. 정말 한 마디 말이 그날의 컨디션에 적절치 않아 마음을 찌른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를 보내고 난 뒤 어머니와의 충돌은 아버지-어머니 간의 충돌에 비하면 꽤나 적다. 같은 남자인데 가족내 위치에 따라서 어머니의 태도는 변화하기 마련인가보다.
* 개인적으로 어머니와의 충돌은 (내 기준에) 지나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저녁먹었니?" - "아뇨~ 배불러요" - "뭐 좀 줄까?" - "아뇨~배불러요" - "그래도 뭐 먹어야지?" - "아뇨~배불러요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봐요." - "저녁도 안먹고 그러니 뭐 좀 먹지" - "배불러요오~ 괜찮아요" - "일루 와 이것 좀 먹어봐" - "아이 참 배부르 다니까" - "그래도 와서 먹어봐" - "아침에 아님 이따 출출하면 먹을께요" - (잠시후...) "뭐 좀 줄까?" 부터 반복.....
두가지 이야기를 비교해보자. 하나는 나이 40이 다되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연극을 하러 나선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또 하나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자녀교육 때문에 남편을 두고 아이들과 외국으로 가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다.
두 이야기 모두 지워진 지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하지만 연극하는 아저씨는 '사랑과 전쟁'에 나오는 아주 특별하고 남자가 욕을 먹을 이야기이고 후자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해도 되는'이야기이다. (때로는 누군가는 이것을 굉장히 부러워 하기도 한다.)
첫번째 이야기를 먼저 보자. 여자는 남편에게 하고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 아니다 오히려 여자는 남편이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다만 사회적인 시선이 돈 안벌로 가정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지 좋은 것이나 하러다니는 철업는 남편으로 만들어버린다. 남자에게는 자아고 뭐고 없다. 현대의 조금 안락한 삶 + @ 를 위해서 희생해야한다. 이 철없는 남편을 두고 대신 나가서 돈을 벌어오면 정말로 대단한 어머니이자 아내가 된다. 물론 집안 살림을 남편이 담당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아내는 이럴때 위대하기 때문에 조금 이기적이어도 된다. 아니 생각보다 좀 더 이기적이어도 된다.
두번째 이야기에서 남자는 외로움을 스스로 선택했다.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면서 떠나보냈고 아이들은 어머니 밑에서 자라야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어머니도 같이 간다. 과연 누가 이 결정을 했을까?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부모 중 누군가의 욕심이 있을 수도 있고, 애가 정말 국내에서 적응을 못할 수도 있고 (물론 각각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 아니면 애가 정말 빠득빠득 우겨서 유학을 갔다거나. 어찌되었든 간에 아버지는 자의반 타의반 외로움을 선택핬다. 그렇게 하길 원하니까 라는 심정 또는 그들이 잘되서 나에게 보답하겠지
여태까지의 긴긴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남자들은 미래를 저당잡힌채로 현재를 바쳐야 하고 여자들은 그 저당잡을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교활해지거나 위대해져야한다. 이 상황을 진화론에 입각해서 해석하면 여자들은 좋은 유전자를 확보하고 양육을 위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할 수 도 있을텐데 글쎄... 증거가 있을까?
간단한 현상에서 출발해보자. 예전에 큰 이슈를 남겼던 루저녀 이도경씨, 그녀가 자기가 스스로 개척해야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한단다. 그때 독일의 미르야 씨는 '그렇게 자신 없으세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이도경씨는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여자가 어떻게 사회나가서 능력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신입사원이 셋이 들어왔는데 한 사람은 미인이고 한 사람은 미인은 아니지만 재치있고 한 사람은 비호감이다. 내가 이 순서를 바꿔 말하면 금, 은, 동 이다. (간혹 동메달은 메달권 밖에 있을 수 도있다.) 미모가 능력이 되는 사회고 어디라도 더 잘되려면 여기저기 뜯어고치거나 비싼 무엇걸치거나 그것도 안되면 몸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셋다 머리를 쓸 일이 없다.
한국남자들은 왜 미르야 씨 처럼 반박을 못 했을까? 남자들이 인정받는 것이라고는 그저 능력 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무슨 사상을 가졌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져 행동하는지 그런 것이 아니라 돈을 잘 벌어들이는 모든 수단을 잘 부리는 실력을 뜻한다. 남자가 포부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도전하는 방법은 도서관에서 죽어라 공부하고 대기업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대기업에 진출하면 옷갖 아양과 기술을 통해서 임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공이고 입신이다.
여자고 남자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무엇을 해보고 싶었을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 볼 수 있을까? 감성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회에 있다. 감성은 없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서 흘러가야하는 사회이다. 그러니 우리모두 자신이 없는 상황일 뿐이다. 앞의 눈치를 봐야하고 하기 싫은 직종인데 삶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밖에 없다. 돈 자체가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목적이 되어간다.
사람들의 욕구의 수준도 그저 낮을 뿐이다. 무엇이 하고싶냐고 물어보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한다. 위대한 물리학 공식을 발견해 내겠다던가, 사회의 부조리를 샅샅이 파헤쳐보겠다던가, 위대한 예술 작품을 남기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맛집을 가는 것이 욕망이고 신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욕망이 된다. 서울의 청담동 거리에서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신 뒤에 명품관에서 쇼핑을 하고 외제차를 타고 멋진 집에 (또는 호텔에) 들어가서 쉬어야 자아가 실현된다. 정말로 안타까운 자아이다. 남자들은 더하다. 아무것도 없고 술과 여자면 자아가 실현된다. 정말 거지같은 자아이다.
요즘은 그래도 조금은 세상은 나아져서 이만큼 보다 나은 자아가 있다. 책이 많이 팔리고 사람들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지식이나 양심을 추구하는 자아들이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자주 등록되는 고은 선생님을 예로 들고 싶은데, 우리는 그 뿐께서 문학계의 큰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얼마나 선생님의 시를 감상할까? 하다못해 블로그에 감상평이라도 쓴 분은 몇분이나 있을까?
결국 거지같은 남녀 자아나, 그보다 조금 나은 자아나, 우리는 그저 남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에 끌려갈 뿐이지 스스로를 찾아내려고 하는 노력은 정말 적다.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고은 선생님의 시를 느끼고 감상하기 보다 남들의 의견을 잘 알고 있으면 그만이고, 남들따라 큰 회사 가면 되고 남들따라 예뻐지면 그만이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지겹도록 들리는 성공신화와 우리나라의 입신양명을 미덕으로 삼는 강제적인 문화가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을 자신의 바깥으로 내몰고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아주 큰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기형적으로 여자들은 교활해지고 이기적인 사람이되고 자녀들을 위해서 위대해진다. 남자들은 애 아니면 개라고 하는데 개가 아닌 애들은 천진함을 버리고 기계가 되고 바보가 된다.
소통, 소통 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대화를 더 하라고 하고 하는데 이 역시도 정말 중요한 것이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하고 자신의 욕구를 관찰하라 주문하고 싶다.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무엇을 하면 내가 일상이 행복해 질 것인지를 고민하라는 것이다. 대기업이 그것을 만족시켜주지도 않으며 명품이 그것을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내 유니폼은 되려 나를 옥죄는 족쇄일 뿐이고, 월급은 생존을 위해 내 자아를 저당잡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빠져버린 당신이라면 지금이라도 고민해보자, 어떻게 지금의 시간과 돈을 조절을 하고 통로를 뚫을 것 인지...(지금 나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저런 연애담을 들어도 잔소리를 하고 챙기는 쪽은 늘 여자쪽이다. 남자는 사고치고 여자들은 기다리다가 화가난다. 군대를 기다리질 않나, 시험붙기를 기다리질 않나, 취직을 기다리기도 한다. 못나고 못해도 여자들은 참아준다. 물론 배신을 당하는 것도 여자이다. 자신을 바치는 것을 보면 존경해야 마땅하다.
여자들은 이기적이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면 당황한다. 그 당황을 대게의 남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감성으로 메우려고 한다. 연인관계에서는 실수가 용납이 되지 않고 실수가 누적된다. 참는 것이 아니다. 두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그 두고봄을 두려워 하는 여자들은 그 실수를 그 자리에서 지적한다. 어떤 방식이든 그 실수들은 여자들에게 '사랑이 식었다'로 보인다. 그리고 다투게 된다. 그걸 달래기위한 공인된 방법으로는 남자가 자신을 다 쏟아내고 여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여자인데, 그 여자가 다 같은 여자라고 주장하고 싶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운 소수와 존경해야할 위인급 소수도 제외하고...) 간단하게 내 어머니의 예를 들어봐도 그러하다. 아버지의 말다툼의 시작은 굉장히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된다. 정말 한 마디 말이 그날의 컨디션에 적절치 않아 마음을 찌른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를 보내고 난 뒤 어머니와의 충돌은 아버지-어머니 간의 충돌에 비하면 꽤나 적다. 같은 남자인데 가족내 위치에 따라서 어머니의 태도는 변화하기 마련인가보다.
* 개인적으로 어머니와의 충돌은 (내 기준에) 지나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저녁먹었니?" - "아뇨~ 배불러요" - "뭐 좀 줄까?" - "아뇨~배불러요" - "그래도 뭐 먹어야지?" - "아뇨~배불러요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봐요." - "저녁도 안먹고 그러니 뭐 좀 먹지" - "배불러요오~ 괜찮아요" - "일루 와 이것 좀 먹어봐" - "아이 참 배부르 다니까" - "그래도 와서 먹어봐" - "아침에 아님 이따 출출하면 먹을께요" - (잠시후...) "뭐 좀 줄까?" 부터 반복.....
두가지 이야기를 비교해보자. 하나는 나이 40이 다되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연극을 하러 나선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또 하나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자녀교육 때문에 남편을 두고 아이들과 외국으로 가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다.
두 이야기 모두 지워진 지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하지만 연극하는 아저씨는 '사랑과 전쟁'에 나오는 아주 특별하고 남자가 욕을 먹을 이야기이고 후자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해도 되는'이야기이다. (때로는 누군가는 이것을 굉장히 부러워 하기도 한다.)
첫번째 이야기를 먼저 보자. 여자는 남편에게 하고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 아니다 오히려 여자는 남편이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다만 사회적인 시선이 돈 안벌로 가정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지 좋은 것이나 하러다니는 철업는 남편으로 만들어버린다. 남자에게는 자아고 뭐고 없다. 현대의 조금 안락한 삶 + @ 를 위해서 희생해야한다. 이 철없는 남편을 두고 대신 나가서 돈을 벌어오면 정말로 대단한 어머니이자 아내가 된다. 물론 집안 살림을 남편이 담당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아내는 이럴때 위대하기 때문에 조금 이기적이어도 된다. 아니 생각보다 좀 더 이기적이어도 된다.
두번째 이야기에서 남자는 외로움을 스스로 선택했다.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면서 떠나보냈고 아이들은 어머니 밑에서 자라야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어머니도 같이 간다. 과연 누가 이 결정을 했을까?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부모 중 누군가의 욕심이 있을 수도 있고, 애가 정말 국내에서 적응을 못할 수도 있고 (물론 각각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있다.) 아니면 애가 정말 빠득빠득 우겨서 유학을 갔다거나. 어찌되었든 간에 아버지는 자의반 타의반 외로움을 선택핬다. 그렇게 하길 원하니까 라는 심정 또는 그들이 잘되서 나에게 보답하겠지
여태까지의 긴긴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남자들은 미래를 저당잡힌채로 현재를 바쳐야 하고 여자들은 그 저당잡을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교활해지거나 위대해져야한다. 이 상황을 진화론에 입각해서 해석하면 여자들은 좋은 유전자를 확보하고 양육을 위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할 수 도 있을텐데 글쎄... 증거가 있을까?
간단한 현상에서 출발해보자. 예전에 큰 이슈를 남겼던 루저녀 이도경씨, 그녀가 자기가 스스로 개척해야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한단다. 그때 독일의 미르야 씨는 '그렇게 자신 없으세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이도경씨는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여자가 어떻게 사회나가서 능력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신입사원이 셋이 들어왔는데 한 사람은 미인이고 한 사람은 미인은 아니지만 재치있고 한 사람은 비호감이다. 내가 이 순서를 바꿔 말하면 금, 은, 동 이다. (간혹 동메달은 메달권 밖에 있을 수 도있다.) 미모가 능력이 되는 사회고 어디라도 더 잘되려면 여기저기 뜯어고치거나 비싼 무엇걸치거나 그것도 안되면 몸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셋다 머리를 쓸 일이 없다.
한국남자들은 왜 미르야 씨 처럼 반박을 못 했을까? 남자들이 인정받는 것이라고는 그저 능력 뿐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무슨 사상을 가졌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져 행동하는지 그런 것이 아니라 돈을 잘 벌어들이는 모든 수단을 잘 부리는 실력을 뜻한다. 남자가 포부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도전하는 방법은 도서관에서 죽어라 공부하고 대기업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대기업에 진출하면 옷갖 아양과 기술을 통해서 임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공이고 입신이다.
여자고 남자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무엇을 해보고 싶었을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 볼 수 있을까? 감성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회에 있다. 감성은 없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서 흘러가야하는 사회이다. 그러니 우리모두 자신이 없는 상황일 뿐이다. 앞의 눈치를 봐야하고 하기 싫은 직종인데 삶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밖에 없다. 돈 자체가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목적이 되어간다.
사람들의 욕구의 수준도 그저 낮을 뿐이다. 무엇이 하고싶냐고 물어보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한다. 위대한 물리학 공식을 발견해 내겠다던가, 사회의 부조리를 샅샅이 파헤쳐보겠다던가, 위대한 예술 작품을 남기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맛집을 가는 것이 욕망이고 신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욕망이 된다. 서울의 청담동 거리에서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신 뒤에 명품관에서 쇼핑을 하고 외제차를 타고 멋진 집에 (또는 호텔에) 들어가서 쉬어야 자아가 실현된다. 정말로 안타까운 자아이다. 남자들은 더하다. 아무것도 없고 술과 여자면 자아가 실현된다. 정말 거지같은 자아이다.
요즘은 그래도 조금은 세상은 나아져서 이만큼 보다 나은 자아가 있다. 책이 많이 팔리고 사람들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지식이나 양심을 추구하는 자아들이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자주 등록되는 고은 선생님을 예로 들고 싶은데, 우리는 그 뿐께서 문학계의 큰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얼마나 선생님의 시를 감상할까? 하다못해 블로그에 감상평이라도 쓴 분은 몇분이나 있을까?
결국 거지같은 남녀 자아나, 그보다 조금 나은 자아나, 우리는 그저 남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에 끌려갈 뿐이지 스스로를 찾아내려고 하는 노력은 정말 적다.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고은 선생님의 시를 느끼고 감상하기 보다 남들의 의견을 잘 알고 있으면 그만이고, 남들따라 큰 회사 가면 되고 남들따라 예뻐지면 그만이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지겹도록 들리는 성공신화와 우리나라의 입신양명을 미덕으로 삼는 강제적인 문화가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을 자신의 바깥으로 내몰고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아주 큰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기형적으로 여자들은 교활해지고 이기적인 사람이되고 자녀들을 위해서 위대해진다. 남자들은 애 아니면 개라고 하는데 개가 아닌 애들은 천진함을 버리고 기계가 되고 바보가 된다.
소통, 소통 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대화를 더 하라고 하고 하는데 이 역시도 정말 중요한 것이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하고 자신의 욕구를 관찰하라 주문하고 싶다.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무엇을 하면 내가 일상이 행복해 질 것인지를 고민하라는 것이다. 대기업이 그것을 만족시켜주지도 않으며 명품이 그것을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내 유니폼은 되려 나를 옥죄는 족쇄일 뿐이고, 월급은 생존을 위해 내 자아를 저당잡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빠져버린 당신이라면 지금이라도 고민해보자, 어떻게 지금의 시간과 돈을 조절을 하고 통로를 뚫을 것 인지...(지금 나도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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