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 먹어버리면 돼죠!
과거에 아이들과 함께하던 시절에 종종 물어보던 질문이 '일본' 싹 쓸어버리면... '북한' 다 쳐들어오면... 종종 '다 먹어버리면'과 같은 질문을 했었어요. 진지하게 검토해보겠다고 답변을 했던 적도 있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답변을 하고 평화와 협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죠. 이를테면 굳이 싸워봐야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솔직히 같은 무리에 있는 부자집 아들까지 포함하여!) 이득 볼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라는가 전쟁을 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는데 어찌보면 해야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는 말들이었죠.
어쩌다 애들이 그런 질문을 했나 생각하다 그들의 환경이 어떤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들이 사는 나라를 만든 어른들이 전쟁을 겪은 세대이다 보니 아직도 가슴에 남은 '전면전'에 대한 미시적, 거시적 피해에 대한 기억이 전반적인 주제가 되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본인 스스로 주변의 생활이 무너질테고 국토가 무분별하게 파괴되는 그런 것들 말이죠. 어쩌면, IMF의 기억은 그런 전면전의 경제 버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살아오면서 다양한 파괴의 경험을 한 세대입니다.
그 경험은 아무래도 제 나이 또래(88만원 세대, 스펙에 찌든 청춘)도 이어받았습니다. 심심치 않게 그런 사고가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아직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안그런 경우도 있는데 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본이 다 빠져나간다 라던가 마비가된다던가 하는 그런 극단적인 가정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그런 가정을 하는 것이 아무래 이전의 '파괴'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해봅니다.
제가 늘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할 때 되뇌이는 '주문'정도로 해야겠네요. 그 중 하나가 추측이나 가정을 할 때에는 극단적인 사례는 단지 예시를 들기위해서만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식당을 열었는데 손님이 없으면 어쩔래?라는 가정은 안한다는 소립니다. 적자가 나기야 하겠지만 식당에 손님이 하나도 없다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에 식당을 열었기 때문에 그렇겠죠. 아마 그렇게 돈을 날리지도 않을테지만...
#2.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것
이 정도 가정을 하면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토론(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을 하거나 신문기사의 사설등을 보면 이런 이야기들은 종종 발견합니다. 검색창에 '미국 자본 다' 라고 쳐봐도 웹문서 쪽에서 몇몇 결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극단적 가정을 하는 것이 하나의 무언가를 설득하기 위한 이유를 대는데 있기 것보다는 공포심을 조장하는 역할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일종의 '호소'입니다. 엉터리이기는 하겠지만 논증에 해당하겠죠. 그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는 이야깁니다. 논증의 목적은 가치관을 심거나 행동에 옮기에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상대방의 행동을 불러일으키거나 가치관을 심기 위해 공포심을 조장한다고 해야겠네요.
단계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어떤 피해에 관해 확대해석을 하지요 '마비가 된'다(속되고 잔인한 말로 '다 죽는'다그러죠...는 것 부터 해서 '나라 망친'다는 말도 있습니다. 두번째 단계는 누군가의 탓으로 돌립니다. 'ㅇㅇ가 나라 다 망친'다던가, 'ㅁㅁ 때문에 해외자본이 유출된'다라던가, 'XX 때문에 체제가 마비가된'다라던가 등이 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단계는 진짜 목적이 등장하죠. 관심을 끄게 한다던가, 다른데로 돌릴수도 있구요. 심지어는 명분을 제시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귀엽게 봐주자면 차두리의 간 때문이야도 비슷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망가진다고 경고하는 것은 공포심을 조장한다기 보다는 상업적이기는 하지만 '걱정'이라는 맥락이 더 어울리겠네요.
① 맨날 처지고 그러다 몸망가진다 -> ② 그게 다 피곤한 간때문이야 -> ③ 우루사(를 사세요)
진짜 공포에 다다르는 수준은 나치 정권의 괴벨스나 과거 미국의 매카시같은 사람들이 유명합니다. 이 둘의 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순서 ②에 해당하는 '누구 때문이야'가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일반적으로 공포심 조장은 순서 ① 에 해당하는 '그러다 큰일난다' 부분이 강조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무엇을 강조하든간에 다 좋다고는 볼 수 없는데 ②에 해당하는 방식인 누군가를 지목하는 방식은 그 대상에게 할 짓, 못 할 짓 다 하게 만들거든요.
비교를 해보자면 일본 사람들이 '튀지 말라'는 교육을 어릴때부터 합니다. 손가락질 받을 것이라는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이죠. 이 때에 누구 때문이인가에 대한 대상은 일본인 전체가 됩니다. 당사자는 일본인에게 적개심을 품기야 하겠지만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게 쏠리는 것도 아니게되죠. 만약 그렇게 되어서 안좋은 일이 일어나면 대게 뉴스에서 나오는 폭력 사건의 수준에서 끝납니다. 이 것 또한 일어나면 안되겠지만 반대의 경우에 비하면 어느정도 해결이 가능한 문제에 속합니다.
바로 그 반대의 경우, 누구를 강조한 사례 중 하나로 홀로코스트를 본다면 사태는 비교가 되지가 않습니다. 물론 국가가 개입했기 때문에 조직화 되어 이처럼 무시무시한 비극이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하나의 대상을 증오하는 심리가 조직화된다면 사람하나는 '하찮게' 되버리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입니다.
키가 180이하의 남자는 별로아는 그 아가씨는 지금 어찌되었을지, 지하철에서 막말하고 신상이 공개된 사람들 무엇을 하고 있을지 교화의 대상인 범죄자는 보복적 죽음의 대상이 되는 등 우리는 누군가 잘못을 하면 이 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추방'하거나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게 합니다. 그게 일부 집단이 하면 괴상한 논리를 가진 시위가 되고 이건 몇몇 사람이 되면 왕따가 되겠네요.
#3. 조금은 찌질해도 괜찮다.
늘 이쯤되면 관용(똘레랑스)이라는 것이 언급되면서 프랑스만 쳐다보죠, 참 부럽다...하면서. 선진국을 본받으라하는데 그런 국민성이 없는 우리는 후진국이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회적 대타협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사회적 대타협이 말뜻은 크게 모두가 양보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마음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아마 없으실 겁니다.
현재 역사적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전쟁이나 국난등으로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단합만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사실 사회,국사 교과서들이 그렇게 가르쳐오죠. 옛날이야 계급사회다보니 그렇다치더라도 지금에는 그렇게 해보려고 하는 시도 조차 소개가 안되니 말이죠.
사실 대타협을 하기에는 우리에게는 주변의 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크게만 봐도 북한이 있고 일본과의 관계도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죠. 대타협을 위해서는 대양보의 경험이라든가 대사과의 경험도 있어야 할텐데 딱히 그런 경험도 없죠. 아무래도 열강들에 둘러싸인 나라다보니 역사의 내러티브 자체가 생존과 버티기에 맞춰져 있으니까요. 패배의 경험은 아무래도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덧 우리 사회구조도 그렇게 흘러가버렸습니다. 서로 맞추기보다는 이기기에 바쁜 상황이 되었죠. 게임이론을 공부해보면 맨 첫장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죄수의 딜레마' 에서 나오지만 서로 경쟁하는 경우에는 최적의 상태가 가장 효율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바로 상호간의 타협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사실 그 타협이란 것이 한번에 나올 수는 없습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청산 위원회가 처음 생길때에도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과거사를 밝혀내기는 하지만 사법심판으로 이어지지 않는 없는 반쪽짜리였었죠. 하지만 여야가 합의하에 만들어낸 기구인데다 그 기본에는 소통이 담겨있어서 희망적인 부분도 많았습니다. 어쩌면 대타협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은 좀 시들시들하네요.
중요한 것은 그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은 죽어라 광고때리고 뉴스에 내보내는 것 보다는 제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나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그 느낌을 사회나 국가 전반에 녹여내는 것이죠. 즉, 국가와 같은 조직적인 힘에 의해서 타협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미디어의 힘은 과거 나치정권의 괴벨스의 방식이 아니라 타협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내보내야겠죠. 그게 더 평창 동계올림픽이 국민들의 힘으로 유치했다는 것 보다 흔히 말하는 '단합'에 효과적일 것입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든 옛 직장 상사는 지는게 이기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본인은 정작 그걸 잘 못했지만 그게 중요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고 알려줬었죠. '그런 사람이야'이렇게 극단적으로 마음 속에서 상대를 못박아버리기 보다는 조금은 찌질하게 굴어도 먼저 손을 내밀고 타협 아니 소통의 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겠죠? 그러고보면 그렇게 못박아버리고 그것을 '원칙'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네요.
기본적인 원칙은 변명의 여지를 주는 것 입니다. 변명이라 쓰고 소통이라 느낍니다.
과거에 아이들과 함께하던 시절에 종종 물어보던 질문이 '일본' 싹 쓸어버리면... '북한' 다 쳐들어오면... 종종 '다 먹어버리면'과 같은 질문을 했었어요. 진지하게 검토해보겠다고 답변을 했던 적도 있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답변을 하고 평화와 협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죠. 이를테면 굳이 싸워봐야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솔직히 같은 무리에 있는 부자집 아들까지 포함하여!) 이득 볼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라는가 전쟁을 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는데 어찌보면 해야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는 말들이었죠.
어쩌다 애들이 그런 질문을 했나 생각하다 그들의 환경이 어떤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들이 사는 나라를 만든 어른들이 전쟁을 겪은 세대이다 보니 아직도 가슴에 남은 '전면전'에 대한 미시적, 거시적 피해에 대한 기억이 전반적인 주제가 되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본인 스스로 주변의 생활이 무너질테고 국토가 무분별하게 파괴되는 그런 것들 말이죠. 어쩌면, IMF의 기억은 그런 전면전의 경제 버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살아오면서 다양한 파괴의 경험을 한 세대입니다.
그 경험은 아무래도 제 나이 또래(88만원 세대, 스펙에 찌든 청춘)도 이어받았습니다. 심심치 않게 그런 사고가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아직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안그런 경우도 있는데 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본이 다 빠져나간다 라던가 마비가된다던가 하는 그런 극단적인 가정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그런 가정을 하는 것이 아무래 이전의 '파괴'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해봅니다.
제가 늘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할 때 되뇌이는 '주문'정도로 해야겠네요. 그 중 하나가 추측이나 가정을 할 때에는 극단적인 사례는 단지 예시를 들기위해서만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식당을 열었는데 손님이 없으면 어쩔래?라는 가정은 안한다는 소립니다. 적자가 나기야 하겠지만 식당에 손님이 하나도 없다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에 식당을 열었기 때문에 그렇겠죠. 아마 그렇게 돈을 날리지도 않을테지만...
#2.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것
이 정도 가정을 하면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토론(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을 하거나 신문기사의 사설등을 보면 이런 이야기들은 종종 발견합니다. 검색창에 '미국 자본 다' 라고 쳐봐도 웹문서 쪽에서 몇몇 결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극단적 가정을 하는 것이 하나의 무언가를 설득하기 위한 이유를 대는데 있기 것보다는 공포심을 조장하는 역할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일종의 '호소'입니다. 엉터리이기는 하겠지만 논증에 해당하겠죠. 그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는 이야깁니다. 논증의 목적은 가치관을 심거나 행동에 옮기에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상대방의 행동을 불러일으키거나 가치관을 심기 위해 공포심을 조장한다고 해야겠네요.
단계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어떤 피해에 관해 확대해석을 하지요 '마비가 된'다(속되고 잔인한 말로 '다 죽는'다그러죠...는 것 부터 해서 '나라 망친'다는 말도 있습니다. 두번째 단계는 누군가의 탓으로 돌립니다. 'ㅇㅇ가 나라 다 망친'다던가, 'ㅁㅁ 때문에 해외자본이 유출된'다라던가, 'XX 때문에 체제가 마비가된'다라던가 등이 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단계는 진짜 목적이 등장하죠. 관심을 끄게 한다던가, 다른데로 돌릴수도 있구요. 심지어는 명분을 제시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귀엽게 봐주자면 차두리의 간 때문이야도 비슷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망가진다고 경고하는 것은 공포심을 조장한다기 보다는 상업적이기는 하지만 '걱정'이라는 맥락이 더 어울리겠네요.
① 맨날 처지고 그러다 몸망가진다 -> ② 그게 다 피곤한 간때문이야 -> ③ 우루사(를 사세요)
진짜 공포에 다다르는 수준은 나치 정권의 괴벨스나 과거 미국의 매카시같은 사람들이 유명합니다. 이 둘의 방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순서 ②에 해당하는 '누구 때문이야'가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일반적으로 공포심 조장은 순서 ① 에 해당하는 '그러다 큰일난다' 부분이 강조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무엇을 강조하든간에 다 좋다고는 볼 수 없는데 ②에 해당하는 방식인 누군가를 지목하는 방식은 그 대상에게 할 짓, 못 할 짓 다 하게 만들거든요.
비교를 해보자면 일본 사람들이 '튀지 말라'는 교육을 어릴때부터 합니다. 손가락질 받을 것이라는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이죠. 이 때에 누구 때문이인가에 대한 대상은 일본인 전체가 됩니다. 당사자는 일본인에게 적개심을 품기야 하겠지만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게 쏠리는 것도 아니게되죠. 만약 그렇게 되어서 안좋은 일이 일어나면 대게 뉴스에서 나오는 폭력 사건의 수준에서 끝납니다. 이 것 또한 일어나면 안되겠지만 반대의 경우에 비하면 어느정도 해결이 가능한 문제에 속합니다.
바로 그 반대의 경우, 누구를 강조한 사례 중 하나로 홀로코스트를 본다면 사태는 비교가 되지가 않습니다. 물론 국가가 개입했기 때문에 조직화 되어 이처럼 무시무시한 비극이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하나의 대상을 증오하는 심리가 조직화된다면 사람하나는 '하찮게' 되버리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입니다.
키가 180이하의 남자는 별로아는 그 아가씨는 지금 어찌되었을지, 지하철에서 막말하고 신상이 공개된 사람들 무엇을 하고 있을지 교화의 대상인 범죄자는 보복적 죽음의 대상이 되는 등 우리는 누군가 잘못을 하면 이 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추방'하거나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게 합니다. 그게 일부 집단이 하면 괴상한 논리를 가진 시위가 되고 이건 몇몇 사람이 되면 왕따가 되겠네요.
#3. 조금은 찌질해도 괜찮다.
늘 이쯤되면 관용(똘레랑스)이라는 것이 언급되면서 프랑스만 쳐다보죠, 참 부럽다...하면서. 선진국을 본받으라하는데 그런 국민성이 없는 우리는 후진국이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회적 대타협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사회적 대타협이 말뜻은 크게 모두가 양보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마음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아마 없으실 겁니다.
현재 역사적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전쟁이나 국난등으로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단합만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사실 사회,국사 교과서들이 그렇게 가르쳐오죠. 옛날이야 계급사회다보니 그렇다치더라도 지금에는 그렇게 해보려고 하는 시도 조차 소개가 안되니 말이죠.
사실 대타협을 하기에는 우리에게는 주변의 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크게만 봐도 북한이 있고 일본과의 관계도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죠. 대타협을 위해서는 대양보의 경험이라든가 대사과의 경험도 있어야 할텐데 딱히 그런 경험도 없죠. 아무래도 열강들에 둘러싸인 나라다보니 역사의 내러티브 자체가 생존과 버티기에 맞춰져 있으니까요. 패배의 경험은 아무래도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덧 우리 사회구조도 그렇게 흘러가버렸습니다. 서로 맞추기보다는 이기기에 바쁜 상황이 되었죠. 게임이론을 공부해보면 맨 첫장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죄수의 딜레마' 에서 나오지만 서로 경쟁하는 경우에는 최적의 상태가 가장 효율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바로 상호간의 타협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사실 그 타협이란 것이 한번에 나올 수는 없습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청산 위원회가 처음 생길때에도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과거사를 밝혀내기는 하지만 사법심판으로 이어지지 않는 없는 반쪽짜리였었죠. 하지만 여야가 합의하에 만들어낸 기구인데다 그 기본에는 소통이 담겨있어서 희망적인 부분도 많았습니다. 어쩌면 대타협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은 좀 시들시들하네요.
중요한 것은 그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은 죽어라 광고때리고 뉴스에 내보내는 것 보다는 제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나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그 느낌을 사회나 국가 전반에 녹여내는 것이죠. 즉, 국가와 같은 조직적인 힘에 의해서 타협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미디어의 힘은 과거 나치정권의 괴벨스의 방식이 아니라 타협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내보내야겠죠. 그게 더 평창 동계올림픽이 국민들의 힘으로 유치했다는 것 보다 흔히 말하는 '단합'에 효과적일 것입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든 옛 직장 상사는 지는게 이기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본인은 정작 그걸 잘 못했지만 그게 중요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고 알려줬었죠. '그런 사람이야'이렇게 극단적으로 마음 속에서 상대를 못박아버리기 보다는 조금은 찌질하게 굴어도 먼저 손을 내밀고 타협 아니 소통의 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겠죠? 그러고보면 그렇게 못박아버리고 그것을 '원칙'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네요.
기본적인 원칙은 변명의 여지를 주는 것 입니다. 변명이라 쓰고 소통이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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