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인문학하는 소리가 많이 나오다보니 곧 있으면 인문학이 큰 트렌드를 만들어 낼 것 같기만합니다. 그동안 참 돈 못벌어오는 하대받던 분야가 슬슬 유행을 타니 인문학도도 아니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특히 서점가면 눈에 띄게 보이는데 TBWA 박웅현 ECD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라던가 정진홍의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찾다』가 매대에서 아직도 잘 나가는 것을 보면 그저 한때의 유행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나 IT 여제라고도 불리는 칼리 피오리나(전 HP CEO)는 대학시절 역사를 전공했다는 것도 알려지면서 경영과 인문학의 접목은 더더욱이 주목받고 있죠. 게다가 픽사 애니메이션은 제작시에 인문학자들의 조언을 많이 받는데다, 픽사대학에서는 그런 과정도 있다고 합니다. 인문학이 경영에 도입이 되면 이렇게 생산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전세계 여러기업에서 입증이 되고있는 모양입니다.
군대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입니다. "너 대학에서 뭐 전공했냐?" 그래서 미대나왔다고 하니 테니스장 줄 좀 그으라 하고 음대나왔다하니 스피커좀 옮기라고 했었다죠? 실제로 저도 사범대 나왔다고 하니까 조교 좀 해보라고 권유받기도했습니다. 제 경우야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미대생에게 테니스장 줄긋는 것은 아무렇게나 그럴듯하게 가져다 붙인 것이죠.
물론 미대생이면 다른 사람들보다야 선에 대한 이해가 더 깊은 만큼 더 괜찮은 선을 그릴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친구가 그럴려고 미대간 것은 아니겠지요? 눈치 채신 분도 있겠지만까놓고 이야기하면 경영에서 인문학을 주목 하는 것은 딱 그 수준이라는 소립니다.
인문학적 소양은 물론 경영이나 생산에는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이유때문에 인문학을 공부해야한다(알아야한다)고 외치는 것은 아이들을 학교에 출세하라고 보느내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인문학은 생산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다루지 않고 인간 외의 목적으로 이용된다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성을 지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마당...닭을 보여주지는 않겠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보고 온 선배가 무슨일인지 평소 영화이야기를 잘 하지를 않는데 그것을 보고왔다고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괜찮고 재밌었다고 하는데 뭔가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는지 나중에 알고보니 주인공이 죽더군요. 그것도 비극적으로 죽는 것도 아니고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야기라 그런지 보고온 사람들은 머리가 멍~해졌다고 전해집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우리는 그 이야기를 보고 왜 멍해졌을까 싶습니다. 아마 멍해져서 아무생각이 없었다기보다는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들이 그 장면을 통해서 머릿속에 망치질을 해댔을 겁니다. 우리가 기대하던 라이온킹같이 악당을 무찌르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디즈니의 해피엔딩이 아니니 말입니다. 어떤 블로그에서는 평하길 잔혹동화라고까지 말하더군요.
"내 삶은 그렇지 않을거야."
디즈니식의 이야기와 마당닭의 이야기에서 큰 차이점은 바로 그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바로 '욕망'을 대입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누구나 원하는 삶이 있고 원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원하는 상태처럼 될 수는 없죠. 현실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도 있고 간혹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사람이 될 수 도 있는 상황이 발생을 하다보니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현대사회는 너무나 힘이 듭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럴까요 아니면 원래 사회살이라는 것이 힘든 것일까요? 맨날 반복되는 삶에 걱정해야할 것들은 한두가지도 아니고 편안하게 살기위해서는 성공해야되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몸으로 체득해야합니다. 그러다 무턱대고 '긍정'에 답이 있다고 하죠. '비관'이나 '달관'은 절대 답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이 답답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주문처럼 외웁니다. "내 삶은 그렇지 않을거야." 이 와중에 우리 욕망은 왜곡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전이됩니다.
다시 말 하자면, 욕망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을 욕망으로 만들기도 해주고(왜곡) 현재의 욕망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을 다르게 해석해주기도 합니다.(전이)
예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네요. 예를 들면 당신을 평등하고 특권이 없어진 사회에서 특권을 만들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명품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사물을 가진다고해서 어떠한 특권도 가질 수는 없는데 특권을 가진 것 처럼 만들어줍니다. 마케팅의 시각으로 본다면 차별화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취향과 고귀함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명품을 지녔다고해서 자신과 관계있는 것은 내 소유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에어조단을 신었다고 해서 지가 조단되는거 아니잖아요.
구체적으로 명품 소비로 더 이 상황을 파헤쳐볼까요? 나는 명품은 말그대로 잘만들어진 상품입니다. 예술작품에 비견되는 상품이죠. 이것을 가지고 다닌 다는 것은 그런 예술작품에 비견되는 물건을 알아보고 선호한다는 1차적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게 명품이라서 삽니까? 루이비통이니까 사지. 아래의 사진이 좋은 사례가 되겠네요.
결국 우리는 명품을 소비하는 것에 대해서 가지는 사회적 지위는 "나는 부자다."라고 이야기하는 2차적 표현 일 뿐이지 예술적 심미안과 같은 그런 식견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이처럼 명품은 우리의 "전문가가 되고싶다거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싶다."라는 욕망을 소비한방으로 왜곡시켜버립니다.
국내 드라마보면 멋진 실장님이 머리긴 신입사원과 티격태격하다 눈맞고 부모의 반대를 끝끝내 이겨내고 사랑에 성공합니다. 그런일이 일어나나요? 절대 안일어난다고는 못해도 멋진 실장님은 머리긴애에게 크게 관심을 주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래도 안생긴다는 겁니다.
잠깐! 혹시 당신 멋진 실장님이 남자라고 생각했다면, 게다가 그 멋진 실장님이 부자라고 생각했다면, 그리고 그 실장님의 차는 외제차라고 생각했다면 그것도 왜곡된 욕망에 굉장히 익숙해졌다는 소리입니다. 물론 머리긴 신입사원이 여자라는 것 그리고 무지 예쁠 것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때까지 이야기를 정리하면 현실의 시련은 삶은 못된 남의 욕심 탓이 아니라, 이 세상에 던져진 불완전한 우리들의 탓으로 인해 스스로의 마음에서 갈등을 겪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어디선가 나타나는 호기심과 욕망을 사회내에 사는 인간이 분출을 해야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현실 규정이나 금기가 그것을 막기도하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내가 참 슬퍼보이기도하지만 내 뜻대로 안되는 현실도 참 밉습니다.
* 신화에서의 영웅들은 이런 시련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모험을 떠납니다. 조셉 캠벨이 자주 이야기하는 신화의 용(이나 괴물)들은 바로 내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 이러한 맥락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물론 그 신화는 결코 그리스신화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 물론 현실의 시련은 사회구조적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지금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하다보니 표현이 결국 내 탓이라고 되었네요. 스스로가 잘못되고 정신차리라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개인을 받아들이자는 의도입니다.
현실에서는 절대악도 없고 절대선도 없습니다. 어쩌다보니 불완전한 개인에게서 시작된 고민들과 욕망이 서로 충돌하다보니 반대쪽의 그 놈들이 참 미워보일 뿐이죠. 마치 정의(Justice)나 미(美)의 기준이 사람과 문화마다 비슷해 보여도 약간씩은 다른 것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디즈니식 해석에서는 자신의 갈등을 절대악을 가진 남의 탓으로 돌려버리죠. 마치
"Dark side of the moon"
다시 인문학의 사례로 돌아와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했습니다. 인어공주에 인문학적 소양을 가미시킨다면 오히려 원전과 같이 왕자만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해피엔딩 보다 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인어공주의 해피엔딩이 더 인간에 가까워 보입니다.
혹여나 월트 디즈니가 "과연 인간이 정말 원하는 욕망은 무엇일까?" 하는 탐구로서 그렇게 스토리를 구성했다면 정말 박수쳐볼 일이기도하겠지만,
이런식의 생산물들을 두고 상업적인 작품주제에 인문학적인 요소마저 가미했으니 참 잘만들었다고 평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냥 재밌다 수준에서 끝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제작자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세세한 부분에까지 고민한 흔적들을 보면 참 기발한 것을 못해 대단한 것까지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정말 가치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전체를 놓고보면 그게 목적이 아니었기에 그 상품은 가치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즉, 인간 사회에 대한 가치는 스트레스 해소를 끝내주게 해주는 정도라고 해야되겠네요.
* 생각해볼 문제가 문득 떠올랐는데 과연 우리는 상업성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도 먹고살려면 그렇게 상업성을 늘 안고 살아야하잖아요.
누구나 현실의 고뇌로 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미술계나 문학계에서도 낭만주의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러한 낭만주의의 작품들은 현실이 고뇌로 가득찬 어려운 시기에 발동했죠. 우리나라같은 경우에는 일제강점기에 등단한 박목월의 나그네를 보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전원의 한적한 풍경이 담긴 모습은 일제 강점기에 상상하기는 힘들죠. 하지만 그렇게 시를 써서 욕망을 드러냅니다. 자극해서 책팔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래도 안생겨요." 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그러한 현실속의 대한 인간의 탐구과 이해입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래도 어떻게든 만들어내죠. 주인공들의 배경이야 어떻든간에 말입니다. 어찌보면 인간현실에 대한 모독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바보같은 우리는 그런 스토리에 지배받고 그것이 "현실"이라 믿고 싶습니다.
카프카와 같이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을 보면 작품만 놓고보면 무서운 것은 카프카입니다. 하지만 책장을 덮어놓고 현실에 돌아와보면 되려 진짜 무서운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사회인 것이죠. 바퀴벌레로 변신한 나를 가족들이 받아주어야 할 것만 같은데 오히려 철저히 외면한다면, 현실에서 파렴치라고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 정신병나자 하는 짓이다 라고 하겠지만 분명히 일어나고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변에서 형제 자매가 부모의 재산으로 다투고 의절하며, 애를 이 학원 저 학원에 메어놓고 대학가야한다며 14시간씩 억지로 공부만 시키고 애는 또 그 현실을 결국 받아들이고, 내 인생은 돈많은 남자로 대기업으로 역전해야하는 현실들 이틀만 주요일간지 사건 부분들을 대충 훑어봐도 친구 몇몇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만 들어봐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 자신의 과거만 생각해도 그런 "생각하기도 싫은
인문학적 소양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인문학을 받아들일 프레임이 되어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과연 인문학이 무엇인지도 좀 인문학은 어쩌면 우리가 받아들이기 껄끄러운 "불편한 진실"일 수도 있거든요. 좋은 것만 받아들이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글쎄요. 좋은 것만 받아들이자는 것인지 맘에 안드는 것을 감춰두자는 것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GDP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이라 아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GDP가 높다고 행복한 것은 아닌 것 말입니다. 소득불평등정도도 해소되어야하고 환경오염도 좀 나아져야하고 미시적으로 주변에 걱정할 거리도 한두가지가 아닐텐데 거시적으로 불안에 할 거리는 부지기수입니다. 인문학적 소양으로 참 인간적인 재화가 나와서 인간 세상을 윤택하게 한다고 하겠지만 현실 사회의 불안과 나의 걱정은 그렇게 왜곡되고 전이된 욕망으로 그때 그때 무마시켜야 할까요?
'투덜투덜 경제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벌이에 대한 고민 (0) | 2011.09.23 |
---|---|
신성장동력과 업종전환 (0) | 2011.08.16 |
브랜드 자산가치에 대한 불편한 진실 : 애니콜을 추억하며 (0) | 2011.08.10 |